짧게 쓸 능력이 안 되어 구구절절 말이 길었네.
용서해 주게
파스칼의 말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명언과 <팡세>라는 불세출의 명작을 남긴 프랑스의 학자, 블레즈 파스칼. 지금까지도 내려오는 그의 편지 말미에는 위에 글이 써져있다고 한다.
뭔가를 간략히 표현한다는 건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수다하게 펼쳐진 나의 분신들을 과감히 숙청해야 한다. 그럴수록 더 정제되고 빛이 날 수 있다. 마치 다이아몬드 가공사가 커다란 다이아몬드의 불순물 걷어내야만 비로소 진정한 다이아몬드가 되듯이 말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고유한 미학을 지닌다. 이것이 장편과는 결을 달리하는 단편의 탄생이다. 혹자는 단순 분량으로 단편이 더 쉬운 창작이라 생각하지만, 예술가들은 하나 같이 이야기한다. 단편과 장편은 영역이 다른 예술이며, 단편만의 고충은 장편에 못지않다고 말이다. 노벨 문학상이 단편 작가 앨리스 먼로를 수상자로 지목한 일이나, 요즈음 엔솔로지와 같은 단편 문학이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단편의 미학이 점점 빛을 내는 듯하다.
영화 <더 테이블>(2017)은 단편의 미학을 잘 느낄 수 있는 영화다. 공간과 시간의 집약. 영화는 끊임없이 덜어낸다. 핑퐁처럼 오가는 언어들 속에 각자의 사연이 있지만, 이는 전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영화는 카페의 한 테이블로 공간을 집약시키고, 어느 하루로 시간을 한정한다. 인물의 이야기 역시 그 순간의 언어로 제한한다. 관객은 감독이 덜어낸 이미지들을 조합하여 인물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는 경험을 한다. 마치 내가 영화 속 카페 직원이 된 것처럼 무심하게 인물들의 대화를 관찰하는 관찰자가 된 듯한 기분을 자아낸다.
이 영화는 김종관 감독이 단편 특유의 질감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 보여준다. 그가 단편 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에서 보여준 센세이션 한 연출을 기억하는 관객이 많을 텐데, 이 작품에서 역시 그의 진가가 드러난다. 사물을 천천히 관조하는 카메라 앵글은 관객의 마음을 몽글거리게 하기 충분하다. 테이블에 마주한 두 인물의 심리 관계를 묘사하는 클로즈업과 바스트샷, 그리고 풀 샷의 충돌은 서사가 부재한 내러티브 속에서 이야기를 창조한다. 여기에는 배우들의 매력이 큰 역할을 한다. 특히 민호 역을 맡은 배우 전성우 님이 인상 깊다.
이 영화는 이렇게 감독의 특기를 살린 단편 4가지가 묶인 영화다. 같은 자리에서 서로 다른 인물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펼친다. 4편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신만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관계'를 말한다. 과거의 지질한 관계(정준원-정유미), 시작되는 설렘의 관계(전성우-정은채), 거짓 속에 진심이 피어나는 관계(한예리-김혜옥), 끝으로 내몰리는 관계(연우진-임수정)까지, 여기서 보이는 4가지 양상은 결국 무언가를 덜어내거나 혹은 포기해야 하는 선택을 하게 만든다. 마치 이 영화의 연출법처럼 말이다. 감독은 영화의 서사를 자신의 트기인 단편의 미학과 결부시킨 셈이다.
파스칼이 언급한 '짧게 쓸 능력'은 결국 내 것을 포기하고 덜어낼 줄 아는 용기다. 수많은 감독들이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가 영화 작업 중에 편집할 때가 가장 힘들다고 한다. 편집은 그동안 소중히 찍어왔던 장면들을 버리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힘든 것도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버려야 하는 선택의 순간이지 않나. 이 영화는 정제된 연출로 잘 포기했고, 잘 버렸기 때문에 보석이 되었다. 우리도 하루하루 무언가를 덜어내기 위한 선택을 한다. 그 순간은 고통스럽겠지만 결국 그것이 우리를 더 빛나게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