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영화이자
최악의 영화이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1991)가 뉴욕비평가협회에서 받은 평가이다. 어떻게 '최고'와 '최악'이라는 모순된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이 영화는 '페미니즘' 측면에서도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혹자는 우리 시대 최고의 페미니즘 영화라고 말한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는 페미니즘을 가장한 '안티-페미니즘'이라고 조롱한다. 과연 무엇이 시네필들을 이렇게 들끓게 하는 것일까? 이토록 치열한 공방이 오간다는 건, 그만큼 이 영화가 잘 만든 영화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30년도 더 된 이 영화를 다시 언급하는 이유다.
리들리 스콧 : "'두 여자가 도로 위를 활주 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칼리쿠리 : "오브 콜스, 와이 낫?"
이 영화의 감독은 리들리 스콧, 각본은 칼리쿠리다. 이미 폼이 미쳤다. 리들리 스콧은 누구나 아는 명감독이고, 칼리쿠리 역시 할리우드에서 내로라하는 작가다. 이 영화는 리들리 스콧이 광활한 대지를 떠올리며 칼리쿠리에게 한 마디 던진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스콧이 "두 여자가 도로 위를 활주 하는 이야기"를 카메라로 담으면 재밌을 거 같다는 이야기에 칼리쿠리는 재미와 갈등 요소를 넣어 영화의 로그라인을 완성한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두 여자가 광활한 대지 위에 펼쳐진 도로 위를 활주 하며 '도망'치는 이야기'인 영화 <델마와 루이스>다.
여자가 저렇게 우는 건,
재밌어서가 아니야!
영화는 광활한 대지 위에 펼쳐진 도로를 강렬하게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른바 익스트림 롱샷으로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마스터 심벌을 스펙터클 하게 제시하며 영화를 출발시킨다. 이후 인물을 조망한다. 바로 앞으로 광활한 대지 위를 도망치게 될 두 여성, '델마'와 '루이스'다. 델마는 가부장적인 남편과 사는 순종적인 여성이다. 그런 그녀가 남편에게 아무 말도 없이 루이스와 여행을 떠난다. 벌써 일탈이 일어났다. 영화의 긴장감이 생기는 순간이다. 긴장감을 다음 씬에서 폭발한다. 바로 남자들로 가득 찬 카우보이 바. 여기서 델마는 성폭행 위협을 받고, 이를 본 루이스는 그 남자를 죽인다. 시나리오 작법상에서 이야기하는 '도발적 사건'이 발발한다. 이 사건으로 이들은 도피 생활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이 인물이 변화하면서 관객은 저절로 인물들에게 빠지게 된다. 그 변화란, 사회에서 강요된 여서성을 내던지고 본인 그대로의 주체가 되는 모습이다.
영화는 기존 영화에서 답습했던 클리셰들을 과감하게 전복시킨다. 스콧이 말한 이 영화의 로그라인 자체가 기존 영화의 클리셰를 파괴하는 문장이다. 본래 광활한 대지는 남성으로 대표되는 서부 영화의 대표적인 공간이다. ' 두 여성이 광활한 대지 위를 달린다'는 곳은 기존 영화 문법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스펙터클인 셈이다. 반면에 이 영화에 등장하는 경찰이나 남편은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내부에 위치하며 여성성과 남성성을 치환한다. 특히 델마가 제이디(브래드피트)를 담는 방식은 압권이다. 델마는 자동차 사이드 미러를 통해 브래드 피트를 보는데, 이건 남자가 육감적인 여자를 담아내는 남성성이 가득한 시선이었기 때문이다.
브리콜라쥬 : 기존의 파편적인 것들을 모아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것
영화는 기존 남성성을 여성에게 투과하며 일종의 '브리콜라쥬' 효과를 내어 관객들에게 충격을 선사한다. 브리콜라쥬란 전쟁 때 적군의 무기를 빼앗아 자신이 사용하는 걸 가리켰다. 이를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확장하며, 기존의 파편적인 것들을 모아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것으로 불렀다. 영화에서는 본래 사용되던 것을 전혀 다르게 표현함으로 전복과 환기의 효과를 거두는 것으로 부르는데, <델마와 루이스>의 연출 방식과 이야기 구성으로 이를 이해할 수 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배치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관객을 영화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다.
영화의 연출은 이러한 브리콜라쥬 효과를 잘 담아낸다. 처음 델마와 루이스를 소개할 때는 굉장히 좁은 공간에서 인물을 담는다. 루이스가 일하는 좁디좁은 레스토랑의 주방. 그런 인물이 광활한 대지 위로 탈출한다. 이런 대비는 주인공들을 더욱 부각한다. 또한 델마와 루이스는 처음에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전형적인 여성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쁜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그들은 카메라에 담기는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그랜드 캐니언에서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은 오롯이 주체가 된다. 서로의 얼굴 보며 서로를 담는다. 여자나 남자라는 구분은 사라진다. 존재 그 자체로서 카메라에 담긴다.
캐릭터 자체도 대비를 이룬다. 이 영화가 '두 여자'를 고집한 이유다. 세 명이거나 네 명이었으면 대비가 어렵다. 이 영화가 재밌는 건 초반에 대비되던 성격이 전복된다는 것이다. 초반에 루이스는 강인하고 주도적인 인물로 나온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오히려 델마가 루이스를 이끌고 더 과감한 행동을 한다. 대표적인 건 제이디(브래드피트)에게 전재산을 빼앗긴 장면인데, 여기서 강인해 보였던 루이스는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데, 델마는 의연하게 대처하고, 심지어 강도짓까지 한다. 이런 극적인 인물 변화는 영화의 텐션을 높이는 원동력이 된다.
그럼에도 이것이 안티-페미니즘이라 불리는 이유
그럼에도 이것이 안티-페미니즘이라 불리는 장면이 있다. 바로 계속 언급되는 제이디(브래드피트)와의 만남이다. 불과 몇 시간 전 성폭행을 당할 뻔했던 델마가 잘생긴 제이디를 만나자 화장을 고치고 교태를 부린다. 여기서 잘생긴 남자에게 한없이 약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며, 이 영화가 여성성을 오히려 부각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이건 가장 페미니즘적인 장면이다. 억압되고 강요된 여성성을 벗어던지는 표현이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잘생긴 사람이면 성욕이 일어나는 인간이다,라는 선언이다. 여성과 남성을 분리하지 말고 똑같은 주체로 보자는 이야기다. 이 역시 오해받고 있는 페미니즘의 클리셰를 전복하고 있다.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지 말고, 여성을 남성보다 우위에 두려 하지 말고, 우리 모두 똑같이 주체성을 가진 인간이고 사람이라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